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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철학자 데이비드 베나타는 쾌락과 고통의 비대칭성을 근거로, 태어나지 않는 것이 태어나는 것보다 논리적으로 낫다는 '반출생주의'를 주장합니다.
  • 그는 인류가 삶을 긍정하는 이유가 객관적인 행복 때문이 아니라, 진화와 사회가 생존을 위해 만들어낸 '친출생 편향' 덕분이라고 분석합니다.
  • 하지만 삶의 가치는 단순한 고통과 쾌락의 계산표로 환원될 수 없으며, 타인의 삶을 논리로 미리 재단하는 것은 지양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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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처럼 세상이 혼란스럽고 미래에 대한 전망이 어두운 시대에는, 과연 아이를 이 땅에 태어나게 하는 것이 옳은 일일까 고민하는 청년들이 많습니다. 아이를 낳지 않는 것이 오히려 그 잠재적인 아이를 고통으로부터 구하는 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죠. 놀랍게도 철학자들 중에서는 정말로 직설적으로 '아이를 낳는 것은 도덕적인 잘못이다'라고 선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방향성의 철학을 가리켜 '반출생주의(Anti-natalism)'라고 부릅니다.

오늘 다룰 주제는 가장 대표적인 반출생주의 철학자인 데이비드 베나타(David Benatar)의 사상입니다. 그의 대표적인 저서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낫다(Better Never to Have Been)』는 우리의 존재 자체가 해악이며 새로운 사람을 만드는 것은 도덕적으로 문제가 된다고 단언합니다. 과연 반출생주의자들은 어떤 논리에 기초해서 이런 주장을 펼치는 것일까요? 그리고 우리는 이 서늘한 철학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낫다는 서늘한 논리

베나타의 주장이 참되다는 것을 증명하려면, 우선 '삶은 나쁜 것'이라는 전제가 성립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그가 내세우는 가장 핵심적인 전략은 바로 '쾌락과 고통 사이의 비대칭성'입니다. 그는 우리의 이익과 손해를 대표하는 쾌락과 고통 사이에 아주 기묘한 불균형이 존재한다고 봅니다.

일반적으로 쾌락이 존재하면 좋은 것이고, 고통이 존재하면 나쁜 것이라는 점에는 모두가 동의할 겁니다. 그런데 베나타는 이 둘이 '부재(없음)'할 때 비대칭적 관계가 성립한다고 주장합니다. 고통이 없는 것은 그 자체로 '좋은 것'입니다. 반면 쾌락이 없는 것은 그것을 아쉬워할 존재가 아예 없다면 '나쁜 것'이 아니라 그저 '나쁘지 않은 것(중립)'에 불과하다는 논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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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충코의 철학 Chungco 제공 영상 · 04:36


이 도식을 삶에 적용해 보면 결론은 명확해집니다. 어떤 사람이 존재하는 시나리오에서는 쾌락(좋음)과 고통(나쁨)이 공존합니다. 굳이 점수를 매기자면 +1과 -1이 더해져 0이 됩니다. 반면,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시나리오에서는 고통이 없으므로 좋고(+1), 쾌락이 없어도 아쉬워할 주체가 없으니 나쁘지 않습니다(0). 결국 합산하면 존재하지 않는 쪽이 존재하게 된 쪽보다 총 가치가 더 높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화성에 아무도 살지 않아서 쾌락이 없다고 슬퍼하지는 않지만, 화성에 누군가 살면서 고통받는다면 우리는 슬퍼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우리는 왜 여전히 삶을 긍정하는가: 친출생 편향

그렇다면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인간의 삶이 베나타의 말처럼 고통으로 가득하고 태어나지 않는 것이 논리적으로 더 낫다면, 왜 대다수의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자신의 삶을 긍정할까요? 베나타는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출생을 긍정적으로 인식하는 경향을 가리켜 '친출생 편향(Pro-natal Bias)'이라고 부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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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충코의 철학 Chungco 제공 영상 · 10:12


그는 인간이 친출생 편향을 가지게 된 결정적 원인이 진화의 원리에 있다고 분석합니다. 진화적 과정에서 출생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던 사람들은 후손을 적게 남기고 도태되었을 것입니다. 반면, 삶을 긍정하고 아이를 낳는 사람들의 유전자만이 살아남아 오늘날까지 이어졌습니다. 즉, 우리는 객관적으로 삶이 훌륭해서가 아니라, 생존과 번식을 위해 출생을 긍정하도록 유전적으로 조건지어져 있다는 뜻입니다.

사회 구조 역시 이러한 편향을 강화합니다. 국가나 사회가 유지되려면 사람이 태어나야만 합니다. 역사적으로 군사력이나 노동력 확충을 위해 정부가 출산을 장려해 온 것도, 다수결 원리를 따르는 민주주의에서 사람 숫자가 곧 집단의 힘이 되는 것도 모두 친출생 편향을 뒷받침합니다. 베나타는 우리가 편향에 오염된 채 삶을 긍정할 것이 아니라, 태어나지 않은 인간의 관점에서 객관적인 삶의 가치를 직시해야 한다고 경고합니다.

삶의 가치는 결코 논리로 계산될 수 없습니다

베나타의 반출생주의 철학은 분명 흥미롭고 날카로운 논리를 갖추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베나타가 짜 놓은 그 논리적인 판 안으로 들어가 깊이 생각하고 싶지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그 판 자체가 삶을 온전히 담아내기에는 꽤나 무력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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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충코의 철학 Chungco 제공 영상 · 16:26


생명의 가치나 삶의 의미는 결코 단순한 논리나 계산을 통해 찾아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베나타는 고통은 나쁘고 쾌락은 좋다는 단순화된 전제를 바탕으로 논증을 펼칩니다. 하지만 과연 고통은 무조건 나쁘고 쾌락은 무조건 좋은 것일까요? 우리가 삶에서 경험하는 가치는 쾌락과 고통이라는 추상화된 기준으로 평가하기에는 너무나 복합적이고 다층적입니다. 추운 겨울 밖으로 나와 차가운 공기를 마실 때 느끼는 감각은 단순한 고통도 쾌락도 아니며, 오히려 그것들을 뛰어넘는 어떤 강렬한 인상입니다.

인생의 가치는 수많은 감각, 생각, 인상들이 삶의 맥락 안에서 얽히고설키며 써 내려져 가는 것이지, 장부의 차변과 대변을 맞추듯 계산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논리 중심의 철학자들은 논리를 거부하는 것을 비이성적이라고 비판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논리적 사고조차도 결국 인간 사회가 오랜 시간 축적해 온 본능, 직관, 일상적 경험이라는 거대한 생각의 네트워크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삶의 가치를 증명하는 데 있어 논리적 설득이 지니는 힘은 생각보다 제한적입니다.

타인의 삶을 미리 재단할 권리는 없다

어릴 적 저는 길거리에 힘들어 보이는 사람들을 보면 깊은 연민을 느끼곤 했습니다. 저 사람이 저 고통에서 벗어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최근 들어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도대체 무슨 권리로 저 사람들의 인생을 재단하고 있는 걸까?' 마치 제가 더 나은 존재라도 되는 것처럼 타인의 고통과 삶의 가치를 함부로 판단하는 것은 오만일지도 모릅니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들의 삶의 가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아이들의 삶이 어떨지는 그들이 스스로 태어나 인생을 겪어보고 스스로 판단할 몫입니다. 타인이 제3자의 입장에서 논리적 잣대를 들이대며 그들의 존재 자체를 좌지우지할 권한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저 역시 아이를 태어나게 하는 것이 객관적으로 이 세상에서 완벽하게 좋은 일이라고 완벽히 정당화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인생은 고통이며 아이는 태어나지 말아야 한다'는 반출생주의의 극단적인 결론은 결코 저를 설득하지 못합니다. 여러분은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과연 삶은 태어나지 않는 것이 더 나을 만큼 고통뿐인 계산표일까요, 아니면 그 모든 논리를 뛰어넘어 겪어볼 만한 가치가 있는 여정일까요?


FAQ

반출생주의(Anti-natalism)란 무엇인가요?

반출생주의는 인간이나 다른 생명체가 태어나는 것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고, 새로운 생명을 세상에 태어나게 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잘못되었다고 주장하는 철학적 입장입니다.

데이비드 베나타는 왜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낫다고 주장하나요?

그는 '쾌락과 고통의 비대칭성'을 근거로 듭니다. 태어나면 쾌락과 고통을 모두 겪지만, 태어나지 않으면 고통을 겪지 않아 '좋은 반면', 쾌락을 누리지 못해도 아쉬워할 존재가 없으니 '나쁘지 않다'는 논리입니다. 즉, 계산적으로 비존재가 존재보다 유리하다는 것입니다.

친출생 편향이란 어떤 개념인가요?

인간이 진화적, 사회적 생존을 위해 삶을 실제보다 긍정적으로 인식하고 출산을 장려하도록 유전적·문화적으로 조건지어진 심리적 경향을 의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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