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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0년 광주 항쟁 이후 탄생한 '임을 위한 행진곡'을 기점으로, 80년대 대학가와 노동 현장은 70년대의 낭만을 버리고 비장한 투쟁의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 1989년 전교조 사태 등을 거치며 10대 대중까지 흡수할 만큼 전성기를 누렸으나, 음악적 전문성보다 이념을 앞세운 집단주의적 아마추어리즘의 한계에 부딪혔습니다.
  • 90년대 서태지의 등장과 함께 노래 운동은 몰락했고, 저항의 거점이었던 대학마저 취업 훈련소로 전락한 지금 우리는 새로운 문화적 진지를 다시 찾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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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한국 음악사는 주류와 비주류가 나란히 폭발적으로 성장한 영광의 시대였습니다. 특히 1980년 광주의 비극을 딛고 탄생한 '노래 운동'은 70년대의 통기타 낭만을 밀어내고 대학가와 노동 현장, 심지어 10대들의 카세트테이프까지 점령하며 거대한 언더그라운드 신화를 썼습니다. 하지만 이 거대한 저항의 불길은 90년대의 문턱을 넘지 못하고 허망하게 사그라들었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였을까요? 시대가 변해서? 대중이 변덕스러워서? 아닙니다. 진짜 이유는 스스로 자신이 누구인지 묻는 근원적인 '자기 객관화'에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이념에 잡아먹힌 80년대 노래 운동의 치명적인 한계와, 저항의 거점을 상실한 현재의 대학 문화에 대해 뼈아픈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낭만을 부수고 등장한 비장한 행진곡

1980년 광주는 한국 현대사의 결정적인 전환점이었을 뿐만 아니라, 한국 음악 문화에도 상상을 초월하는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그 중심에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중요한 노래 중 하나인 '임을 위한 행진곡'이 있습니다. 백기완 선생의 시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이 곡을 작곡한 사람은 놀랍게도 1978년 대학가요제에서 서정적인 노래로 은상을 받았던 전남대생 김종률이었습니다. 살벌한 투쟁가와는 거리가 멀어 보이던 평범한 대학생이, 자기 고향 한복판에서 벌어진 참상을 목격하고 이 곡을 쓰게 된 것입니다.

이 노래는 행진곡이지만 씩씩한 군가풍이 아니라, 단조로 이루어진 굉장히 비장한 곡입니다. 이 단조 행진곡의 포맷은 이후 80년대 중반까지 한국 대학가 노래 운동의 롤모델이 되었습니다. 사람이 죽어 나가는 현실을 목격한 80년대 대학가는 더 이상 70년대 통기타의 낭만주의를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낭만과 결별한 자리에 직설적이고 비타협적인 선동이 들어섰고, 1987년 6월 항쟁과 이어진 전국 노동자 투쟁을 거치며 이 노래 운동은 대학가를 넘어 노동자 계급 전체로 확산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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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철공소닷컴 제공 영상 · 02:38


10대의 눈물샘까지 터뜨린 저항 가요의 최전성기

노동 현장으로 퍼져나간 노래 운동은 크게 두 갈래로 나뉘었습니다. 김호철 같은 작곡가가 등장하며 블루칼라 노동자의 정서에 맞춘 '노동자 노래단(이후 꽃다지)'이 만들어졌고, 다른 한편에서는 지식인 중심의 '민중문화운동연합'이 합법적인 공간으로 진출하며 '노래를 찾는 사람들(이하 노차사)'을 결성했습니다. 이 비합법, 반합법의 음반들이 전체 대중과 폭발적으로 만나게 된 결정적 계기는 바로 1989년 전교조 창립 사태였습니다.

당시 고등학생들은 자신이 존경하는 선생님이 교단에서 쫓겨나고 잡혀가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습니다. 한국의 고등학생들이 4.19 혁명 이후 처음으로 사회 모순에 문화적으로 동참하게 된 순간이었습니다. 입시에 치여 살던 10대들조차 노차사의 불법 복제 테이프를 돌려 들었고, '사계',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가 담긴 노차사 2집은 그해 변진섭의 앨범 다음으로 많은 무려 75만 장이 팔려나갔습니다. 80년대 내내 성장해 온 저항 노래 운동이 10대 후반 세대까지 흡수하며 거대한 대중적 영향력을 손에 쥔 최전성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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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철공소닷컴 제공 영상 · 07:05


음악인이냐 활동가냐, '어설픈 사회주의'가 부른 붕괴

하지만 대중적인 영향력이 커질수록 이들은 치명적인 모순에 직면하게 됩니다. 첫 번째 한계는 이 노래 운동의 주동자들이 대부분 '비음악 전공자'였다는 점입니다. 이들은 음악에 대한 전문적인 고민보다는 좌파적 이념의 연장선에서 음악을 '도구'로 사용했습니다. 오버그라운드와 언더그라운드의 경계가 허물어지면서, 이들은 혼란에 빠졌습니다. "나는 음악인인가, 아니면 음악으로 투쟁하는 활동가인가?"

저는 1991년 무렵 노차사 공연을 연출하고 교육하면서 직설적으로 경고했습니다. "너희들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진보적인 대중음악을 하는 사람들일 뿐이다. 스스로를 거창한 혁명가나 활동가로 착각하면 이 운동은 실패한다." 대중은 변덕스럽고 늘 새로운 것을 원합니다. 진지함만으로는 살아남을 수 없으며, 끊임없이 음악적·기술적으로 환골탈태해야 한다고 말이죠.

게다가 이들의 조직 운영은 어이없을 정도로 경직되어 있었습니다. 노차사는 가수와 연주자가 각각 10명씩 무대에 서는 비대한 조직이었습니다. 짜장면을 시켜도 20그릇씩 시켜야 유지되는 구조였죠. 철저한 운동 집단이었기에, 노래를 잘하는 한 명이 마이크를 독점할 수 없고 모두가 공평하게 파트를 나눠야 했습니다. 결국 개인의 개성과 재능이 억눌린 안치환, 김광석 같은 진짜 실력자들은 불만을 품고 팀을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어설픈 사회주의적 시스템이 스스로의 경쟁력을 갉아먹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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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철공소닷컴 제공 영상 · 15:09


대학의 몰락, 다음 시대의 비주류는 어디에 있는가

결국 아마추어적인 진정성이냐, 프로페셔널한 전문성이냐는 갈림길에서 진화에 실패한 노래 운동은 서태지와 아이들의 등장과 함께 순식간에 몰락하고 맙니다. 수년 동안 새가 빠지게 부르던 투쟁가보다 '발해를 꿈꾸며'나 '교실 이데아' 한 곡이 대중에게 훨씬 더 거대한 사회적 파장을 일으키는 것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봐야 했습니다.

미국이나 한국이나, 이 영광스러운 80년대 주류와 비주류의 이인삼각에서 비주류의 거점이 되었던 곳은 바로 '대학'이었습니다. 따라서 80년대 언더그라운드의 몰락은 곧 대학의 몰락과 동의어입니다. 오늘날 대학은 더 이상 최후의 사회적 진실이나 미래를 향한 열망을 담지하는 공간이 아닙니다. 학생들을 모으기 위해 축제에 아이돌을 부르는, 그저 스펙을 쌓는 직업 훈련소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그렇다면 20세기의 저항 기지였던 대학이 기능을 상실한 지금, 새로운 시대의 비주류는 어디서 싹을 틔워야 할까요? 우리는 그 거점이 어디가 될 것인지에 대해 치열하게 숙고하고, 맨땅에 헤딩하며 새로운 아젠다를 찾아 나서야 합니다. 과거의 영광은 흘러간 추억으로 묻어두고, 다가올 미래의 타이밍을 준비해야 할 때입니다.


FAQ

1980년대 대학가 노래 운동의 분위기를 바꾼 결정적인 곡은 무엇인가요?

1980년 광주 민주화 운동을 배경으로 탄생한 '임을 위한 행진곡'입니다. 이전 70년대의 낭만적인 통기타 문화와 결별하고, 비장한 단조 행진곡의 형태를 띠며 80년대 투쟁 가요의 롤모델이 되었습니다.

대중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던 '노차사'가 단기간에 몰락한 진짜 이유는 무엇인가요?

음악적 전문성보다 이념을 앞세운 '아마추어리즘'과 경직된 조직 문화 때문입니다. 대중음악으로서의 진화(환골탈태)를 거부했고, 공평함만을 강조하는 비대한 집단주의 시스템 탓에 안치환, 김광석 등 뛰어난 재능을 가진 인재들이 이탈하면서 스스로 경쟁력을 잃었습니다.

80년대 언더그라운드 음악의 몰락과 대학 문화는 어떤 관계가 있나요?

80년대 저항 문화와 비주류 음악의 핵심 거점이 바로 '대학'이었습니다. 노래 운동이 몰락하고 90년대를 거치며 대학이 사회적 진실을 탐구하는 공간에서 단순한 취업 스펙 훈련소로 전락한 현상은, 과거 언더그라운드 생태계의 붕괴와 궤를 같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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