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전증, 조기 진단과 꾸준한 치료로 일상생활 충분히 가능


뇌전증은 특별한 유발 요인 없이 반복적으로 뇌에서 기원하는 발작이 발생하는 만성 신경계 질환이다. 과거에는 ‘간질’이라는 용어가 사용됐으나, 질환에 대한 사회적 오해와 낙인을 줄이기 위해 2010년 이후 ‘뇌전증’이라는 명칭으로 통일됐다. 현재 뇌전증은 치매, 뇌졸중, 편두통과 함께 국내 4대 만성 뇌질환으로 분류되는 주요 신경계 질환이다.

뇌전증은 전 세계적으로 인구의 약 1% 내외가 앓고 있는 비교적 흔한 질환으로 알려져 있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자료에 따르면 국내 뇌전증 환자 수는 2020년 이후 매년 증가 추세를 보이고 있으며, 2022년 기준 약 15만 명에 이른다. 강동경희대학교병원 신경과 변정익 교수는 “뇌전증은 드물거나 특이한 질환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발생할 수 있는 만성 질환이라는 인식이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뇌전증은 저혈당, 저나트륨혈증, 알코올 금단과 같은 뚜렷한 유발 요인 없이 발생하는 비유발성 발작이 24시간 이상의 간격을 두고 두 차례 이상 반복될 경우 진단된다. 외상, 뇌졸중, 뇌종양 등 중추신경계를 침범하는 다양한 질환이 원인이 될 수 있으며, 소아부터 고령층까지 전 연령대에서 발생할 수 있다. 다만 전체 환자의 절반가량에서는 명확한 원인이 발견되지 않는 경우도 적지 않다.

뇌전증 발작은 발생 범위에 따라 전신발작과 부분발작으로 나뉜다. 전신발작은 대뇌 깊은 부위에서 시작해 양측 대뇌로 동시에 퍼지는 것이 특징으로, 대표적으로 전신 강직간대발작이 이에 해당한다. 이 외에도 소아에게 비교적 흔한 소발작이나 근육이 순간적으로 수축하는 근간대성 발작도 전신발작에 포함된다. 반면 부분발작은 대뇌피질의 특정 부위에서 시작되며, 발작이 시작되는 위치에 따라 증상이 매우 다양하게 나타난다.

부분발작의 경우 멍해지는 상태, 입맛을 다시는 반복 행동, 한쪽 팔다리의 떨림뿐 아니라 저림, 통증, 갑작스러운 공포감, 환청이나 환시와 같은 감각 이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 때문에 뇌전증은 흔히 의식을 잃고 쓰러지는 큰 경련만을 떠올리기 쉽지만, 실제로는 경련이 없는 비전형적 증상으로 나타나는 경우도 많아 주의가 필요하다.

눈앞이 번쩍이는 증상, 이유 없는 어지럼증, 한쪽 몸의 이상 감각 등은 일시적이거나 뚜렷하지 않아 방치되기 쉽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가 반복된다면 뇌전증 발작의 한 형태일 수 있어 전문적인 평가가 필요하다. 변정익 교수는 “뇌전증 발작은 반드시 눈에 띄는 경련을 동반하지 않기 때문에, 원인 없는 신경계 증상이 반복된다면 적극적인 진단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뇌전증 진단에서 가장 중요한 과정은 철저한 병력 청취다. 발작이 언제, 어떤 양상으로 발생했는지에 대한 정보가 진단과 치료 방향을 결정하는 핵심 근거가 된다. 발작은 일시적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아 의료진이 직접 확인하기 어렵고, 환자 본인이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 때문에 보호자가 당시 상황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거나, 가능하다면 발작 장면을 휴대전화 영상으로 촬영해 의료진에게 보여주는 것이 정확한 진단에 큰 도움이 된다.

진단을 위해서는 뇌파검사와 뇌 자기공명영상검사(MRI)가 기본적으로 시행된다. 뇌파검사는 뇌 신경세포의 전기적 활동을 기록해 발작의 발생 부위와 유형을 분석하는 검사지만, 첫 검사에서 이상 소견이 확인되는 비율은 절반에 미치지 못한다. 증상이 의심될 경우 반복 검사나 수일간 뇌파를 부착해 관찰하는 비디오-뇌파 모니터링 검사가 필요할 수 있다. MRI로 명확한 병변이 확인되지 않는 경우에는 PET이나 SPECT 검사를 통해 기능적 이상을 추가로 평가한다.

뇌전증 치료는 약물치료가 기본이다. 전체 환자의 약 70~80%는 항발작제 복용만으로 발작이 충분히 조절된다. 현재 약 20종에 가까운 항발작제가 사용되고 있으며, 환자의 발작 유형과 연령, 동반 질환 등을 고려해 맞춤형으로 선택한다. 일반적으로 저용량에서 시작해 점진적으로 증량하며, 부작용을 최소화하면서 적정 유지 용량을 찾는 과정이 중요하다.

두 가지 이상의 항발작제를 충분한 용량으로 사용했음에도 발작이 지속되는 난치성 뇌전증의 경우에는 수술적 치료를 고려할 수 있다. 정밀 검사를 통해 발작 발생 부위가 명확하고, 기능 손상 없이 접근이 가능하다고 판단되면 해당 부위를 제거해 발작의 원인을 근본적으로 차단할 수 있다. 수술이 어려운 환자나 약물 효과가 제한적인 경우에는 미주신경자극술이나 전문의 감독하에 케톤 생성 식이요법이 대안으로 활용될 수 있다.

치료와 함께 생활관리 역시 중요하다. 금주, 충분한 수면, 스트레스 조절은 발작 예방의 기본 원칙이다. 항발작제는 식사 여부와 관계없이 정해진 시간에 규칙적으로 복용해야 하며, 복용을 잊었을 경우 다음 약을 임의로 증량해 복용해서는 안 된다. 수영이나 등산처럼 사고 위험이 있는 활동은 주의가 필요하며, 불가피한 경우 보호자와 동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운전은 1년 이상 발작이 없는 안정된 상태에서 가능하며, 임신을 계획하는 경우에도 사전에 전문의와 충분한 상담이 필요하다.

변정익 교수는 “뇌전증은 적절한 약물치료와 올바른 생활습관이 병행되면 충분히 조절 가능한 질환”이라며 “모든 치료와 생활 관련 결정은 반드시 전문의와 상의해 진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강동경희대학교병원 신경과 변정익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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